페미니즘

젠더는 해롭다

In_sun 2020. 6. 3. 13:54

가부장제 사회는 교활하게도 아동이 자기 몸에 해가 되는 일을 할 때에만 아동의 인지 능력과 선택권을 높게 친다. 아동이 성폭력, 성착취, 성적 대상화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는 말하지 않으면서, 아동이 성폭력, 성착취, 성적 대상화를 선택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인다. 13p 옮긴이의 말

 

그는 “동성애자라는 멸시받고 처벌받는 특수한 역할을 만듦으로써 사회 대다수를 순결하게 유지할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심리학계 및 정신 의학계가 동성애자 ‘낙인’을 찍는 과정에 참여하며 ‘사회 통제 메커니즘’으로 기능했다고도 말한다. 동성애를 보는 이런 방식은 트랜스젠더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트랜스젠더 역할이 만들어진 이유도 용납 불가능한 젠더 행동을 올바른 젠더 행동으로부터 분리해 내려는 시도로 해석해볼 수 있다. 여기서 올바른 젠더 행동이란 특정 성별로 태어난 사람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행동인데, 왜냐하면 그 외의 행동은 남자는 지배하고 여자는 종속되는 현 체제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를 역할로 분리하면서 이성애를 독자적·자연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굳힐 수 있었다면, 트랜스젠더 역할은 성역할이 자연적이라는 생각을 끌어낸다. 69p

 

"동성애자 자신도 동성애가 주어진 조건이라는 생각을 환영하고 지지한다“ ... 동성애가 주어진 조건이라면 ”등 떠밀려 정상성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없어지며 ”선택의 갈등이 소거“되기 때문이다. 즉 나는 나에게 마땅한 방식으로 행동할 뿐이니 ”사회의 정상 규범을 거부“하고 나서지 않아도 된다. 거창한 저항 없이 계속 그렇게 행동할 정당성이 생긴다. 69p

 

맥휴는 “잘못된 몸”에 들어앉은 기분이라고 말하는 남자 환자를 “심심치 않게” 만나봤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평생 이런 느낌이었다는 환자 말을 있는 그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 환자의 성장 과정을 지켜본 사람에게 꼭 확인해 보라고 권한다. 환자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맥휴는 다른 문제도 짚는다. “자기가 여자라는 느낌”은 그저 성별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여자 의사들은 즉각적으로 이들이 남자 관점에서 여자의 태도와 관심사를 희화화하고 있다고 느꼈다.” 82p

 

레이 블랜차드는 자기여성화도착증 환자는 (주로 비교되는 대상인) 동성애자와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바로 동성애자는 크로스드레싱에서 시작해 트랜스젠더리즘으로 넘어가는 이성애자 남자와는 달리 굳이 지나가는 사람의 반응에서 성적 만족을 찾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 자기여성화도탁증 환자는 본인이 영원히 이어지는 ‘영화’ 속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이들의 여편이나 주변 사람은 원치 않아도 관객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92-93p

 

남자에게 여자가 된다는 생각, 그리고 여자됨을 이루는 부속품을 걸친다는 생각이 흥분된다면 그건 여자됨이 종속적 지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남자가 억지로 여장을 하거나 여자가 된다는 상상을 해볼 때 찾아오는 달콤한 흥분은 남성성을 잃는다는 흥분이다. 즉 남자됨이라는 우월한 지위를 빼앗겨 여자됨이라는 종속적 위치로 내몰린다는 마조히즘적 흥분이다. 흥분의 원천은 남성 지배와 여성 종속이라는 카스트 체계, 즉 젠더 위계이며, 이 위계를 벗어나면 흥분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열렬히 여성복을 찾는 건 여성복이 더 예뻐서도, 더 만족스러워서도 아니다. 옷에 담긴 상징적 의미 때문이다. 여자들이 남자의 크로스드레싱 행위와 트랜스섹슈얼적 충동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이들에게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 여자에게 여성성은 오르가슴의 원천이 아니라, 낮은 지위에 뒤따르는 고되고 부담스러운 측면이다. 어쩌면 바로 이런 이유로 남자가 여자의 종속적 지위를 에로화 한다는 시각보다는 여성적 체질 이론이나 잘못 배정된 ‘젠더’라는 개념이 훨씬 받아들이기 쉬운 것일 수 있다. 94-95p